첫째날 ======================
멀리 여행갈 때 날씨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역시 중요한 일이다.
한여름인데 설마 춥기야 하겠는가 란 생각은
북구를 여행한다면 섣부른 생각이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내려 청사 밖으로 나오자 마자 ‘아차’ 싶었다.
작년에 베를린에서 초여름에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여긴 한여름인데도 파카입은 사람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북위 52도,
서울보다 한참 위인데다 우리 체류기간 내내 비가 내렸다.
북해를 끼고 있어서 비바람이 심한 곳이다.
해가 쨍 하다가도 어느새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야말로 심심하면 한번씩 퍼붓는 식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가 깨끗해 보인다. 심심하면 물청소 ㅋ.
7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아직 많이 남았다.
여름엔 10시가 되어야 어두워진다고 한다.
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시내에 운하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여긴 국토의 많은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아
인공물길을 내어 치수한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낮은 땅'이란 뜻이며,
암스테르담의 '담'은 영어의 'dam'을 뜻한다.
건물들은 상당히 개성이 있다. 판에 박은 듯 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운하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나라는 지반이 약해 건물들이 서로 의지하게끔 붙여지어야 한단다.
그 단조로움을 지붕모양을 다르게 해서 다양하게 만들었다.
현대식 건물들도 다양하게 지어놓아 도시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암스테르담 운하 주변의 집들
호텔 첵인하면서부터 짧은 영어실력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같이 문법위주로 영어를 배운 이들은 아이러니컬 하지만
문법에 맞게 말하려 애쓰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가능하면 짧게, 요점만 말하고
상황에 맞는 표현이면 단어하나로도 족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개방적인 사회분위기 때문인지
유럽 다른나라들에 비해 영어구사능력이 비교적 좋다고 한다.
가방을 옮겨준 벨보이에 팁을 줘 보내고 나면 비로소 모든게 편안해진다.
부부 단둘이서 머나먼 이국땅에 내리면 무언가 더 결속되는 느낌이 난다.
말도 생김새도 모든게 낮선 가운데
서로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게 무의식적으로 각인된다.
사랑하는 영선씨와 다시 유럽에 왔다.
이번엔 그녀가 좋아하는 오페라를 두편 예약해놓았다.
내깐엔 완벽하게 준비했다 생각하는데 과연 모든게 순조롭게 돌아갈까?
내일은 아침 일찍 투어에 나서야 해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날 =====================
반 고흐는 렘브란트와 함께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고흐 미술관 앞에는 아침 일찍부터 관람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고흐가 활동한 연대별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그의 생애와 화풍의 변화를 한눈에 살펴볼수 있었다.
그의 전기 작품들은 네덜란드의 날씨마냥 어둡고 음울한 그림이 대부분이나,
후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시기에는 날씨의 영향인지 화풍이 눈에 띠게 밝아진다.
우울증 환자가 우울의 심연에서 벗어나는 회복기에 자살을 많이 한다더니
그도 그런 경과를 밟은 것은 아닐까?
반 고흐 미술관
한식당에서 점심식사후 암스테르담 교외의 잔세스칸스에 갔다.
이곳은 네덜란드 전통의 풍차들이 남아있는 곳으로
나막신 공장, 치즈 공장들이 같이 있어 우리나라의 민속촌같은 곳이다.
바람이 많은 지방이니 풍차가 발달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리라.
나막신 공장에서는 나무토막을 가지고 나막신 만드는 공정을 시연해주는데
한 오분정도면 한 켤레가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나막신은 가죽보다 따뜻하고 방수기능이 좋아
습한 네덜란드 농촌에서는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한다.
한 번 신어보니 생각보다 발이 불편하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은 운하가 거미줄처럼 뻗어있어 해상운수도 발달하였지만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것 없이 자전거를 정말 많이 타고 다녔다.
네덜란드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라
자전거 타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일찌감치 자전거를 권장하는 정책을 펴,
이나라는 대략 1인 1자전거라 한다.
시내 도로마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널찍하게 잘 갖춰져 있었으며
중앙역 앞에는 자전거 수천대를 주차할 수 있는
3층짜리 거대한 주차장도 있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다고 하는데
(평균신장; 남 183, 여 171)
이들이 치즈를 즐겨먹고, 자전거를 많이 타서 그렇단다 - 믿거나말거나.
셋째날 =====================
오늘은 내가 암스테르담에 온 이유 –
스피노자(1632~1677)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날이다.
그의 유적지는 -
암스테르담의 생가, 레인스뷔르흐의 셋집, 덴하그의 마지막 거처와
근처 신교회에 있는 그의 묘지 등이다.
원래는 나 스스로 지도에서 찾아 돌아보려 했으나
아무래도 안내인이 있는 편이 좀더 효율적인 탐방이 될 것 같아
현지 맞춤투어로 진행하였는데
가이드가 스피노자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
별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스피노자의 생가터는 암스테르담 시내 렘브란트 하우스 근처에 있다.
17세기 지도와 현재의 구글지도를 비교해보니
큰 줄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의 생가는 보존되지 못하였고 그 터엔 그의 동상 하나만이 서 있다.
그가 약 4세기전 이곳에서 걸어다녔을 것을 상상하니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했다.
긴 망토를 걸치고있는 그의 동상에는 새들이 새겨져있고
(아마도 자유의 상징이리라)
그 옆에는 20면체의 도형이 놓여있다. 이 기하학적 도형은
그가 말하는 ‘만물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의
무한한 속성중의 하나가 표현된 것으로서,
신으로부터 유래한 자연법칙의 무소불위, 영원불변한 속성을 나타낸다.
모든 사물에는 기하학적 법칙과도 같은 신의 원리와 법칙이 내재해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현상, 초자연적인 현상은 없다.
단지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했을 뿐.
모든 개체는 신의 원리와 법칙 안에서 생성, 소멸한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또 결과가 원인이 되어 무한히 나아간다.
신의 세계에서 나쁜 개체란 없다.
단지 우리의 이익에 반할때 '나쁘다'고 간주된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나쁜것들을 포함하는 이 세계, 이 우주를 긍정한다는 것이며,
진심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평화와 감사하는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동상의 밑단에는 라틴어로 “국가의 목표는 자유이다” 라고 새겨져있다.
이는 현재의 네덜란드가 매춘, 마약, 낙태, 안락사, 동성연애 등 많은 부분에서
시민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대부터 부각되어온 네덜란드의 자유주의적 전통이
살아있는 한마디라 할 것이다.
스피노자 또한 이런 자유주의적인 풍토에서 그의 철학을 꽃피울수 있었으며,
반대로 이 사회도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훌륭한 정신적 자양분을
얻고 있다고 생각된다.
인근의 유대교 박물관에 들렀다.
회당의 내부는 기독교회와는 또 다른 전통적 문양과 집기들이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그 특징적인 종교적 분위기에 약간의 반감이 일었다. - 여기엔 아마도
스피노자를 파문했던 당시 유대교회에 대한 반감이 서려있을 것이다.
그 제단에서 갖은 저주와 협박을 홀로 감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젊은 스피노자를 그려보았다.
덴하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서쪽으로 차로 약 한시간 거리에 있다.
스피노자가 말년에 세들어살던 덴하그의 집은 일반에 개방하지 않는다.
거기서 렌즈를 깎아 생활하며 책을 쓰던 그는 45세의 이른 나이에 타계하고 만다.
렌즈를 깍을 때 날아오른 미세분진이 폐에 쌓이는 진폐증이 사망원인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인근의 신교회Nieuwe Kerk에 묻히나,
후에 묘지 관리비를 납부하지 못해 타지로 이장되고
지금은 기념비만 남아있다 한다.
레인스뷔르흐는 덴하그와 암스테르담의 중간쯤에 위치해있는데,
스피노자의 중년기에 대학이 있는 이 학구적인 도시에서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살았다 한다.
그가 세들어 살던 집은 후에 스피노자 추종자들이 매입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여기엔 그가 쓴 책들, 소장했던 책들, 자필서한, 렌즈깎는 기계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글씨체를 보니 역시 상당한 명필이다.
주저 '에티카'의 자필 원고
방명록에 기록하고 왔다.
고흐박물관처럼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지는 않았지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덴하그에도 암스테르담에도
스피노자가 살았던 집 근처에 홍등가가 있었다.
덴하그의 홍등가는 스피노자 하우스에서 길하나 건넌 지역에 있었는데
여기는 ‘저가형’ 홍등가란다.
대낮인데도 몇몇은 손님을 받으러 나와 있었고
특히 얼굴이 쭈글쭈글한 할머니들도 눈에 띠었다.
저래가지고 먹고는 살려나 걱정되었다.
여기에 비하면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물이 훨 좋다.
쭉빵걸들이 백인 흑인 가리지 않고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흑인 청년이 잘빠진 백인 창녀와 흥정하는 모습도 눈에 띠었다.
우리나라에도 홍등가는 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선 매춘이 불법, 여기선 합법이다.
여기서 종사하는 창녀들은 직업인으로서 합법적인 권리 - 휴가, 파업 등을
모두 누린다고 한다.
넷째날 ====================
오늘은 암스테르담 순례를 마치고 잘츠부르크로 넘어가는 날이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요새 오페라에 깊이 빠진 울 마눌의 꿈이었다.
특히 그녀가 최고로 좋아하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출연한다.
새벽같이 일어나 짐싸고 스키폴 공항으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뮌헨까지 비행기로 한시간반,
뮌헨에서 잘츠부르크까지 열차로 두시간반이 걸린다.
혹시나 비행기의 연착을 우려하여 기차시간까지 2시간의 터울을 두었더니
시간이 많이 남는 것이었다.
오픈티켓이라 이른시간의 열차로 바꿔 탈 수 있었으나
좌석예약은 돈을 좀 더 내고 변경할 수 있었다.
잘츠부르크는 암스테르담에 비해 한결 날씨는 좋았으나
서울에 비해서는 여전히 쌀쌀하고 비가 많이 내렸다.
도시가 작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웬만한 곳은 다 걸어서 갈 수 있어 좋았다.
유서깊은 자허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앞에는 Salzach강이 흐르고 Makart라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었다.
7시반에는 모짜르트의 '돈지오반니' 가 모짜르트 하우스에서 있었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지휘하는 빈필의 연주였다.
드레스코드에 맞추느라 양복으로 갈아입고 호텔을 나섰다.
길거리에서도 연주회가는 사람과 일반 관광객은 옷차림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너도나도 정장차림에 특히 여성들은 한껏 멋을 부린 이들이 많았으나
대부분 노장년층이었다.
2등석의 가격이 350유로정도 하니 상당히 비싼편이다.
축제는 유럽의 돈많고 음악 좋아하는 노인들의 사교장 같았다.
우리자리는 우리열의 맨끝 좌석이었는데
우리 앞을 사람들이 통과해야 해서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무릎만 당겨 비켜주었더니
지나가면서 뭔가 머뭇거리는 듯 하였다.
조금 후에 보니 사람이 지나갈때는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주는 것이었다. ㅋ
모두 하나같이 일어서주고 지나가면서 '당케' 하고...
우리앞을 지나던 사람이 머뭇거리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지.
이후부턴 우리도 누가 오면 열심히 일어서 주었다.
그냥 앉아서 비켜주고 아무말 없이 지나가는것 보다는
일어서주고, 고맙다고 인사해주는게 서로에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축제는 매년 7~8월에 걸쳐 열리며
유럽의 정상급 오케스트라가 다 모일 정도로 수준높은 축제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고
오페라는 연출도 상당히 실험적으로 해서 찬반이 갈리는듯 하다.
난 원래 클래식음악을 좋아하지만 오페라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공연장의 음향이 좋은데다가 공연의 수준이 높아
그런대로 재미있게, 졸지않고ㅋㅋ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사실 앉아서 졸기엔 티켓값이 너무 비쌌다. ㅎ)
축제극장
다섯째날 ==========================
오늘은 오전에 파노라마투어사의 'Eagle's nest tour'에 참가하였다.
영어로 진행하는 투어라 어떨까 싶었지만
경치구경하는 투언데 대충 알아들으면 되었다.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한 버스에 타고 출발.
시내를 벗어나 교외의 농가를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이글즈 네스트는 오베르잘츠부르크산 정상에 있는 히틀러의 별장이라 한다.
해발 2000m 높이의 이 별장에서 나찌 간부들과 주로 작전회의를 했다 하며,
에바 브라운과 함께 지낸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잘츠부르크 교외의 마을
산길에 냇물이 흐르는데 이상하다, 물이 허옇고 탁하다.
유럽땅은 석회성분이 많아 물이 맑지않다고 한다. (울나라의 좋은 점 또 발견!)
우리나라의 투명하고 맑은 물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
산 중턱에서 정상가는 버스로 갈아타고는 까마득한 절벽길을 한참 오르고,
숏홀길이정도 되는 터널을 걸어서 통과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산장에 도착한다.
독일 알프스의 절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추워, 추워", -- 평지에서도 쌀쌀했는데 산꼭대기에 올라갔으니
바람불고 얼마나 춥겠는가.
우리는 여름옷만 챙겨온 탓에 암스테르담에서 부터 계속 추위에 떤다.
아무거라도 사서 걸치면 되는데 아무거나 걸치는 성미가 아닌 울 마눌은
옷구경만 하고 있다 ㅋㅋ
독일 알프스의 전경
저녁에는 모짜르트 재단의 홀에서
루돌프 부흐빈더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연주회가 있었다.
'비창'과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포함, 5곡을 연주하였다.
귀에 익은 비창소나타를 본고장에서 들으니 감상이 좋다.
앙코르 곡으로 모짜르트의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부흐빈더는 모짜르트 연주에 더 호감이 갔다.
여섯째날 =====================
오늘은 '**비행기나라'란 여행사의 잘츠부르크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일어나 조식을 챙겨먹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우리만의 단독 투어였기에 가이드가 좀 늦나보다 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1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연락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화했더니 현지 담당자란 사람이 투어가 있는지조차 모르는것 같았다.
확인해본다 하고 잠시후 전화해서는 가이드가 갑자기 아파서 어쩌고...
그럼 전화도 못하나? 변명하는게 뻔히 보였다.
조금 있다 다시 전화해서는 우리가 약속장소를 잘못알고 갔단다.
우리를 비엔나의 투어팀으로 착각하고 하는 말이었다.
결국 이 날은 투어도 볼만한 연주회도 없는 공치는 날이 되고 말았지만
이국땅이 주는 호기심은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진 않았다.
동물보호협회?의 전위적인 길거리 시위 -
사람을 비닐포장했는데 속에서 막 움직인다.
점심때는 '무궁화'란 한식당을 찾아 갔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인 미라벨 정원 근처에 있다.
유럽땅을 밟은 이후 편안한 식사에 굶주린 우리는
김치찌개, 파전 같은 것을 시켜먹으며 즐겁게 식사했다.
해외에 나와보면 한국사람, 한국음식이 제일 좋은것 같다.
저녁때도 거기가서 먹었다.
하루에 같은 식당을 두번 간건 난생 처음이 아닌가 싶다.
이번엔 불고기를 먹었는데 고기가 좋아서인지 매우 맛있었다.
한국인 남매가 함께 운영하는 집인데 반갑게 맞아주고 서비스도 좋았다.
백인들이 서툰 젓가락질로 우리 음식을 즐겨먹는 모양이 눈에 띠었는데
현지인들이 고객의 70%를 차지한다고 하니,
현지화에 성공한 케이스로 보였다.
저녁에는 호텔앞의 마카르트 다리로 가
그녀몰래 준비해 온 자물쇠(찬♡영선)를 난간에 달았다.
그녀도 조금은 감동 받았으리라. ㅋ
형형색색의 자물쇠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빼곡이 들어차있다.
우리 자물쇠의 위치는 자허호텔 건너편쪽에서 두번째 등 아래이다.
지금도 그 아름다운 곳엔 우리 사랑의 징표가 굳게 걸려있겠지.
일곱째날 =========================
점심을 먹으러 또 '무궁화'에 갔다.
서울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물도 공짜, 차도 공짜로 주었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는 먹는 인심은 뛰어나게 좋은 곳이다.
(울나라 좋은점 또 발견!)
잘츠부르크의 유명 카페 - 토마젤리
저녁에는 그녀가 고대하던 '안나'가 등장하는 공연이 있었다.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가 다니엘 가띠 지휘의 빈필 연주로
축제대극장에서 상연되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루나백작역으로 출연하는 줄 알았으나
고령으로 힘이 딸리는지 루친스키와 교대로 등장해 이날은 볼 수 없었다.
안나 네트렙코는 러시아 태생의 소프라노로서
가창력, 연기력, 미모의 삼박자를 갖춘
현존하는 최고의 디바라는데 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축제대극장은 카라얀의 주도하게 건축되었으며
바위산을 깎아 만든 극장으로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 비교할 때 무대는 크고 객석의 수는 적어보였으며
1층 가장자리에서도 무대에 대한 시야가 좋았고,
음향도 풍부하게 잘 들렸다.
이번에도 맨 가장자리 좌석이라
먼저 앉아있다가는 사람들이 들어갈때마다 일어서줘야 해서
아예 안쪽 좌석이 다 찰때까지 복도에 기대 서 있었다.
이번 '일 트로바토레'도 현대적 연출이 시도되어
제1막의 무대가 현대의 미술관이었다가 과거의 무대로 옮겨가는 형식이었다.
울 마눌은 이에 대해 더 몰입이 안된다고 탐탁치 않게 여겼다.
레오노라역을 맡은 안나는 역시 돋보이는 존재였고 무대를 휘어잡았다.
공연이 끝나고 이삼십분 기다리니 출연진들이 팬서비스를 위해 밖으로 나왔다.
마눌은 안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았다.
안나 네트렙코
여덟째날 =====================
잘츠부르크에서 비엔나까지는 고속열차로 2시간반이 걸렸다.
비엔나에서의 첫날은 까페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비엔나엔 오래된 전통의 유명까페들이 많다.
그 중 처음 방문한 곳은 까페 첸트랄 (Central, 1876~)
이곳은 당시 여러 유명한 예술가, 정치가, 학자들의 만남의 장소였으며,
트로츠키, 프로이트도 자주 들렀던 곳이라 한다.
카페 첸트랄의 내부
높은 아치형의 천정이 성당내부를 연상케 한다.
이곳은 빈의 대형 까페들 처럼 식사도 가능하였다.
우린 이곳에서 오스트리아의 토속음식들 - 슈니첼, 굴라쉬 등을 시켰다.
슈니첼은 돈까스 비슷하고 굴라쉬는 육계장 같아
별 거부감 없이 먹을수 있었다.
빈의 까페에서는 종업원이라고 아무나 주문을 받아주지 않는다.
종업원간에도 위계질서가 엄격해서 고참이 되어야 고객을 직접 상대하여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해준다고 한다.
계산도 테이블에서 하는게 보통이다.
울 마눌은 커피를 매우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
빈에 왔으니 비엔나커피를 즐기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비엔나에는 '비엔나커피'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비엔나 커피의 원래 이름은 아인슈패너(Einspanner)다.
아메리카노에 휘핑크림을 얹은 커피를 말한다.
아인슈패너
이 외에 비엔나 고유의 커피로서 멜랑주(Melange)가 있는데
이는 에스프레소에 우유거품을 얹은 카푸치노와 비슷한 것이다.
유럽의 커피는 양이 많지 않아 좋다.
우리나라도 예전의 다방커피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프랜차이즈점들이 점령하면서 미국의 영향이겠지만 컵이 무지하게 커져
우리부부는 한잔을 시켜 둘이 마셔도 남는다.
다음으로 '하벨카'란 카페를 방문하였다.
이곳 역시 유서깊은 곳으로 훈데르트 바써, 그레이스 켈리 등이 단골이었다고 하며,
Buchteln이란 빵으로 유명한데 이는 잼이 들어간 식빵같은 것으로 맛이 괜찮았다.
이곳은 특징적으로 메뉴판이 없고 칠판에 메뉴를 적어놓는다.
그리고 모든 실내의 벽이나 바닥, 가구들을 낡은 그대로 쓰고있었는데
소파는 팔걸이부분이 까맣게 때가타고 다 해져 있어
모르고 들어왔다가 '뭐 이런데가 있어' 하면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을것 같았다.
아홉째날 ======================
오늘은 비엔나 시내투어가 있는 날이다.
먼저 벨베데레 궁으로 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들을 감상하였다.
고흐의 네덜란드 날씨처럼 어두웠던 화풍이 프랑스로 건너가면서 밝게 바뀐것 처럼
클림트도 전기의 사실주의적 화풍이 나중에
신비적, 추상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쇤부른 궁전은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방이 1441개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일 뿐 아니라
그 내부의 호사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하긴 당시 왕들은 신격화 된 존재였다니 그렇게나 이해할까.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손들을 출산했다는 침실을 보면서
신격화된 인간의 모습이 떠올랐다.
쇤부른 궁의 정원
암스테르담도 그랬지만
비엔나의 도로는 인도와 차도 외에 자전거 전용도로, 트램등이 얽혀
복잡해 보였지만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었다.
관광명소가 밀집한 구도심은 크기가 작아 웬만한 곳은 도보로 이동가능하며,
경관이 좋고 공기가 맑아 걷는데 쾌적한 느낌을 주었다.
24시간짜리 교통권을 만원정도에 구입하여 사용하였는데
이것으로 시내 대중교통 - 지하철, 트램,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교통권을 사용할때는 처음에 한번만 개찰하면 되는데
그러면 날짜, 시각이 찍혀나오며,
이후에는 지하철이나 트램등을 내집 드나들듯 자유롭게 타고내릴수 있다.
개찰하지 않고 사용하다가 적발되면
무임승차로 간주, 많은 벌금을 물어야한단다.
저녁에는 Karls 성당에서 열린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러 갔다.
들어보지 못한 악단의 연주라 좀 망설였지만
그래도 본고장인데 웬만큼은 하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연주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마치 맛없는 음식과 같았다.
비엔나 시내에 고전의상을 차려입고 이런 종류의 음악회에 호객행위를 하는
'삐끼'들이 많이 있는데, 절대 비추다.
클래식을 잘 아는 사람은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 역시 별 감흥을 얻지 못할 것이다.
재미없는 공연을 보고 꿀꿀한 기분에 식사를 하려고 호텔 식당에 앉았는데
아뿔싸! 내 폰이 없는 것이 아닌가.
온 몸을 뒤져봐도 없다. 여행 마지막날 이런 낭패스런 일이...
폰을 잃어버리니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성당에서 졸다가 주머니에서 흘렸거나
아니면 여기도 소매치기가 많다던데...
멘붕상태에서 식사를 마치고 pc로 '내아이폰찾기'를 해보려고
비즈니스 센터로 가는데 프론트에서 직원이 날 부른다.
손에 까만 핸펀을 들고 '이것이 당신거냐?'고 묻는다.
어떤 손님이 호텔입구에 떨어져 있는것을 주워다 주었단다.
세상에, 이렇게 좋을수가, 이렇게 고마울수가, ㅋㅋ
열째날 ==================
점심때 비엔나의 유명까페중 첫날 방문하지 못했던 '까페 데멜'(1786~)에 갔다.
(이집은 7시면 문을 닫는다)
호프부르크왕궁 근처에 있는 이 유서깊은 까페는
왕실의 베이커리로 명성이 높았다 한다.
형형색색의 케익들이 수없이 많았다.
2층으로 갔는데 20분 정도 줄을 서 기다려야했다.
케익을 주문하는 방식은 -
진열대에서 케익을 고르면 직원이 품명이 적힌 종이를 주는데
이걸 가지고 자리에 와 주문하면 가져다주는 식이다.
여기서도 슈니첼과 디저트 케익과 멜랑주를 시켰다.
카페 데멜
오늘은 귀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라
특별한 일정없이 간단한 쇼핑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아뿔싸 - 빈 시내는 일요일이면 먹는집과 박물관,
기념품가게만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빈의 오리지날 '스와로브스키'는 그림의 떡이었다. ㅋㅋ
열흘이 꿈같이 후딱 지나갔다.
좋은 시간은 더 빨리 가기에 인생이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물론 종종 그녀와 다투기도 하였지만
(붙어있으면 다투지 않을수가 없는것 같다)
전체로 볼때 다툰것 마저도 추억이 될 것만 같은
아름답고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인생은 신의 선물이거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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